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견디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애도를 완결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읽고 써야 한다.
― 김연수, 시절일기
최근 반 년 사이 코비드-19 사태로 사람들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여가와 놀이의 가치가 수직 상승했다. 게임 산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받는 와중에 닌텐도 사에서 최근 출시된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성황을 이뤄 판매를 시작한지 며칠이 안 되어 물건이 동나거나, 품귀 현상으로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매매되기도 하였다. SNS 상에서는 <동물의 숲>이 단순히 플레이를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서 소유 자체에 대한 갈망까지 불러 일으키는 듯했다.
<동물의 숲>의 주요한 플롯은 사용자가 무인도에 이주해서 같은 섬에 사는 동물 이웃과 교류하고, 채집, 수집 등의 미션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을을 가꾸는 것이다.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겠으나, 게임 내에서 동물이라는 속성은 귀여움이나 특별함 같은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발판으로 작동한다. 동물이 나의 플레이를 즐겁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의 메커니즘은 동물에 대한 나의 협소한 관심을 동물이 서사 속에서 어떻게 표상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시켰다.
<동물의 숲>에서 동물 이웃들은 귀여움이라는 가치를 투사하는 대상이 되고 소유하고 싶은 특별한 대상이 되었으나, 소비의 대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물이 이야기 속에 개입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동시대 한국 작가들은 문학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동물을 표상하는가? 이 글에서는 『무민은 채식주의자』[1]를 읽으며 그 표상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리얼리티와 함께 접힌 채로 가려져 있던 현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민은 채식주의자』는 걷는사람 출판사의 초단편 소설 시리즈 <짧아도 괜찮아>의 네 번째 책으로, 동물권을 테마로 한다. 책에는 구병모, 김서령, 이장욱 등 총 열여섯 명의 작가가 작품을 수록하였고, 각각의 소설들은 평균 12쪽 내외 분량으로 매우 짧다. 서로 다른 작가의 텍스트를 여러 편 모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시도하려는 공시적 분석에 이 책이 적합하리라 판단했다.
가장 먼저 각 소설의 소재와 서술자를 분류해 경향성을 보고자 한다. 16편의 소설 중 반려동물을 소재로 다루는 소설은 8편이다. 특히 김봄의 「살아 있는 건 다 신기해」, 김서령의 「퐁당」, 김연희의 「지용이」 등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획이나 고민 없이 반려동물을 입양해오는 상황을 그렸다. 16편 중 4편의 소설에는 식육용 동물이 소재로 다루어진다. 김은의 「오늘의 기원」에는 식육용 닭이 서술자로서 사육시설에서 길러지는 모습을 직접 드러낸다. 이주란의 「겨울은 가고」에서는 AI 판정 농가 주변에서 예방적 살처분을 맡은 공무원이 자살하는 사건을 다룬다.
그 외에 군사병기이자 의료실험의 대상이 되거나[2], 농촌에서 노동력을 차출하기 위해 기르는 가축으로 활용되거나[3], 동물원에서 관람의 대상이 되는[4] 등으로 동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시대 작가들이 동물권이라는 테마에 접근하는 경로가 반려동물로 집중되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인간의 삶을 위해서 희생되는 동물이라는 표상을 공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세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설에서 비인간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가 직,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반려동물 유기와 유기동물 안락사, 동물실험, 공장식 축산업, 예방적 살처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비인간 동물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사회적 문제로서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인간이 아닌 동물이 서술자로 등장하는 소설이 전체 16편 중 네 편이라는 점도 눈에 띄는 특징이었다. 이때 동물 서술자들은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도 하고[5] 반대로 동물 서술자가 인간을 착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6] 대상이 되는 동물을 착취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킴으로써 비인간 동물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 다르게 말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 기술의 바깥을 가리키는 상상력
정세랑의 단편소설 「7교시」는 2200년대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작중 인류는 2100년이 채 되기 전 인구수의 3분의 1을 잃는 대멸종을 겪은 후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람들은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가, 새나 모기가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라고. 그때까지도 과잉 생산 과잉 소비 체제를 끌고 가려고 애쓰던 기업이, 자본이,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논리에 복속된 정부를 변화시킨다. 인류는 인구수 통제, 도심 압축, 자연 회복 영역 설정 등으로 인간 활동에 적극적인 통제를 가하며 환경주의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지구의 다른 생명과 공존하는 방법을 비로소 배워나간다.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대멸종 전후로 우주 이주 계획이 연달아 실패했다는 것이다. 주인물 ‘아라’는 처참한 이주 실패가 체제 변혁을 성공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을 거라고 자조하며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야 이 작은 행성의 가치를 매겼"다고 평가한다.
이미 오염되어서 소생할 가망이 없는 지구를 벗어나 행성 바깥의 영토를 개척하겠다는 우주 이주 계획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로부터 시작한다.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감소시킨다. 나는 우주 이주 계획에 대한 짧은 언급을 읽으면서 현정권의 '그린뉴딜' 사업을 떠올렸다. 기술과 자본으로써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 우주 이주 계획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저탄소 구조로의 전환, 녹색기업 육성 등을 골자로 하는 '그린뉴딜'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주요 국정 과제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린뉴딜은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투자와 지원인 한편 국내산업 경쟁력 향상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그린 뉴딜의 주된 목적이 일자리 창출에 있다고 강조했으며[7], 환경부가 지난 3차 추가경정예산안으로 증액 편성한 5,867억원의 그린뉴딜 사업 예산 중 상당 부분은 녹색기업 성장 및 녹색기술 혁신 생태계 구축 사업에 투자될 예정이다.[8]
기술의 발전만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인간의 문명을 통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근대적인 사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는 한 인류가 오늘날 살고 있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도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은 아직 도망갈 수 있는 어딘가가 남아 있다는 우주 이주 계획의 희망과 맞닿아 있다. 더 나은 기술로 환경 오염을 막겠다는 시도가 더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하는 결과로 귀결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플라스틱 사용과 온실가스 배출을 막으려는 적극적인 규제를 추진하지 않으면서 녹색기업과 녹색기술을 통해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는 그린뉴딜은 기존의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답습하는 것으로만 느껴진다.
하물며 그린뉴딜 사업을 둘러싼 이해가 경제 부흥과 일자리 창출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7교시」에서 인류가 대멸종을 겪기 전까지 환경주의와 생명권은 경멸과 냉소의 대상이 되었고, 소수의 주장에 머물렀을 뿐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다. 그린뉴딜이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적절한 규제가 아니라 투자의 형식으로 수행하며 자본과 경제 아래로 복속시켰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에서 환경주의가 거래의 대상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한국형 그린뉴딜이 경기 부양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환경주의를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다.
작중 아라를 비롯한 학생들은 생명권 수업에서 모피를 입고 육식을 즐기던 21세기 사람들의 영상자료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역겹다는 반응을 표출한다. 그중에서도 "요리 프로그램 자료들은 그로테스크의 극치였다." 아라의 친구인 미조는 당시에는 배양 단백질이 없었으니 집단의 문화를 개인이 전복하고 앞서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 옛날 사람들을 변호한다. 아라는 미조에게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세계관의 문제였지."라고 대답한다.
아라와 미조의 대화에서 기술만으로 사회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고관은 다시 한 번 논의에 부쳐진다. 미조는 21세기 사람들이 공유했던 육식 문화의 원인으로 배양 단백질 생산 기술의 부재를 꼽는다. 하지만 인공육이 상용화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육식을 멈추리라는 예상은 지나치게 납작한 바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살아 있는 동물을 먹는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인식이 곳곳에서 형성될지라도, 인공육이 아닌 '진짜' 고기를 먹는 행위는 희소하고 특별한 가치를 획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인공육을 먹는 사람은 누구이고, 특별한 가치를 지닌 '진짜' 고기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 아마 높은 확률로 육식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더 '진짜 같은' 고기를 재현하는 데에 기술이 활용될 것이다. "세계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배양 단백질을 바탕으로 아무것도 해치거나 오염시키지 않는 무해한 식사를 공급받는 23세기 사람들이 오늘날 주류적인 식문화에 대해 보이는 즉물적인 혐오는 어쩌면 부당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23세기를 건너다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3세기의 식탁 위에 펼쳐진 장면에서 우리의 식문화가 다른 생명에 대한 착취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때에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미래로 넘어가는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 있고, 반려동물을 넘어 인간으로 인해 희생되었던 비인간 동물 전체로 사유를 확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관(에피스테메)이다. 내가 입고 먹는 것이 고기가 아니라 동물이고 생명이라는 세계관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경제가 아무리 원활하게 작동한다고 해도 인간이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라는 인식으로 도약해야 한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새로운 세계관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2. 인간 고기는 맛이 없어
이장욱의 단편소설 「무민의 채식주의자」는 비인간 동물이 서술자로 등장하며, 비인간 동물이 인간을 착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술자 '나'는 무민과 헤어지고 난 후 육식에 대한 격렬한 욕망에 시달리며 매 끼니 엄청난 양의 고기를 먹어치운다. 소설은 지면의 약 30%를 냉장고에 보관된 날고기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할애한다. '나'는 고기를 종류별로 갖추어 놓고 각 부위를 어떻게 손질했는지, 최적의 보관 방법은 무엇인지, 어떤 부위를 어떻게 요리하면 좋은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내'가 은밀한 목소리로 읊어나가는 요리 방법을 듣다 보면 쇠고기나 돼지고기의 익숙한 맛을 상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게 된다. 문제는 냉장고 속 날고기에 대한 묘사 직후에 무민이 이런 행위를 비판하는 "채식주의자이자 반인육주의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서술자 '내'가 고기라고 부르던 것이 인육임이 드러날 때, 독자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입맛을 다시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식욕에 이입했다는 당혹감과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내가 먹는 고기가 인간의 살과 다르지 않다는 감각과 함께 오는 충격은 나에게도 한동안 영향을 미쳐 고기를 볼 때마다 식욕과 역겨움을 동시에 들게 만들었다.
서술자 '나'의 철저한 보관 원칙과 마이너한 부위까지를 아우르는 식성에서 드러나듯이, 「무민은 채식주의자」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취향'이다. 인간의 귓불까지 남김없이 조리하는 ‘나’의 집착은 「7교시」에서 무해하고 담백한 음식 외에는 다른 맛을 궁금해하지 않는 아라의 식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가 하면 무민은 자신이 인육을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인육은 맛이 없고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서술자 '나'는 인간을 먹는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무민의 말에 인간은 유해 종이고, 개체 수 과잉인 생물이므로 생태계의 관점에서 인간 고기를 먹는 것이 논리적이고 자연스럽다고 항변한다. 적절한 기계화와 자동화를 통해 사육 및 도축 과정에서의 비윤리성을 줄이고 위생적인 고기를 납품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눈길을 끌었던 지점은 무민이 비윤리성과 함께 자신의 식이 기호를 병치했으며, 서술자 '내'가 무민의 취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 없이 곧장 수긍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취향은 이 소설에서 강력한 역학 구조를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이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다른 소설에서도 취향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얼마나 예쁘고 귀엽게 보이는가'가 반려동물을 선택하는 동기이자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연희의 「지용이」에서 선미는 분양해올 고양이를 정하면서 "성격이냐 외모냐의 문제인데 외모가 빼어난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고 생각한다.
무민이 채식을 하는 이유로 비윤리성을 드는 것은 꽤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맛이 없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생경하다. 나는 무민이 자신의 취향과 윤리관을 함께 말하는 것을 보며 난데없이 취향의 원천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맛있다든지 좋다든지 하는 가치판단은 바뀌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취향은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 정치적, 윤리적 맥락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중에 그때그때 형성된다. 그렇다면 인육이 맛이 없다는 무민의 취향이 자신의 윤리관과의 영향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면 반대로 무민의 윤리관이 취향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만약 비윤리성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무민이 취향에 대한 언급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스스로의 가혹함에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모든 사람(혹은 트롤)이 육식을 맛있게 느낄 거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한 꺼풀 벗겨보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은 맛있는 고기를 두고도 정언명령에 따라 채식을 실천하는 '대단한' 사명감과 신념을 가진 '고행자'라는 편견이다. 이러한 편견은 사실상 채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 아닌 사람을 분리시키고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는 경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구를 억지로 참는 것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해낼 수 없는 고된 일로 치부될 때에야 식육의 잔인함에서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가 '대단한 고행자'로서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은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난민에게 요구되었던 '착한 표상'과 맥을 같이 한다. 식이 소수자 또한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존재임이 증명되었을 때에만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한편 자신을 채식주의자이자 반인육주의자로 규정하는 무민의 윤리적 무결함을 의심하는 질문은 어디를 공격하는가. 앞서 나열한 물음은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취향을 떠나 오직 신념만을 따를 것과 높은 수준의 절제력을 가질 것을 강요한다. 이 강요는 곧바로 백 퍼센트 순수하고 선하지 않으면 채식주의자로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다수의 폭력으로 변질된다. 채식주의자와 반인육주의자 여부를 그를 지켜보는 외부의 제3자가 판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방인 혐오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육식에 있어서 취향의 문제는 개인의 생활과 윤리적 실천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인간 고기가 맛이 없다는 무민의 평가는 식이 소수자에 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취향에 대한 발화의 정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동물과 공존하는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어떤 개체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동시에 취향의 개입은 소수자를 둘러싼 사회의 압력과 혐오를 가시화시킨다. 동물과 공존하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개인은 자신의 윤리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또 그 개인은 특정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
3. 초라함의 윤리
위수정의 「검은 개의 희미함」은 동물 유기와 열악한 보호소 및 구조단체 환경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서술자 '나'는 유기동물을 구조하고 보호하는 각종 단체에서 강도 높은 활동을 한다. '나'의 활동은 개인의 생활 공간 안쪽으로까지 이어져서, 보호소에서조차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개와 고양이들을 좁은 집에서 보호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업무와 함께 사는 동물들에 대한 케어로 '나'의 일상은 무너져 있다. '나'의 주변에서 나는 '개 냄새'는 유기동물 문제를 체화한 자의 낙인이다.
서술자 '내'가 과거에 활동을 이어나간 계기는 분노였다. '나'는 개를 대상으로 하는 학대와 착취, 그리고 그것을 쉽게 외면하는 수많은 방관자들에 대한 분노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면서 그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조차 잃어버린다. '나'는 오히려 "동물을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면서도 그 무심함이 자꾸 이해되려고 해서 괴로웠다"고 고백한다.
'나'의 피폐한 내면은 그 자신의 윤리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집에서 보호하는 동물들에게 폭력적으로 투영된다. 고양이가 식탁에 뛰어올라 반찬 그릇 하나가 엎어지자 '나'는 욱하는 마음으로 고양이를 세게 밀친다. '나'는 잠결에 보호하고 있는 강아지를 비닐봉지에 넣고 한강에 던지거나 고양이들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한편 술자리를 같이 하던 R은 '나'를 향해 "개돼지가 짐승이지 사람이냐? 사람도 짐승처럼 사는 마당에."라고 비아냥거린다. R의 종 차별주의는 비인간 동물을 학대하면서, 착취하면서, 그것을 외면하면서 '나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서술자 '나'는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그들이 인간으로 인해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스스로를 세계에 바친 듯하다. '나'에게는 취향은커녕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다. 그런 점에서 서술자 '나'는 자신의 삶을 바쳐 동물을 구하려는 '대단한 고행자'로 보인다.
하지만 '나'의 영웅적 투신이 결과적으로 삶이 무너지는 고통을 야기했고 그것이 비인간 동물에게 다시 폭력으로 되돌아갔으니, 이제는 개인의 일상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모범적인 말로 이야기를 멈추고 싶지는 않다. 자신을 소진함으로써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으니 장기적으로 보고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도 굳이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제 존재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의 초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비인간 동물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희생'이다. 비인간 동물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그의 몸과 시간을 빼앗겼다. 결코 지구상에 동물들이 공존한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 이 비대칭적인 희생이 당연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비로소 소수의 사람들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비인간 동물과의 공존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조차 작금의 비대칭성을 이유로 인간이 역으로 비인간 동물을 위해 그만큼 희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중 '나'처럼 자신의 생활을 잃어버릴 정도로 몸과 마음을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가, 설령 그 요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비인간 동물을 먹어 치우고, 옷과 가방으로 만드는 동안에도 자신의 생활만큼은 어느 정도 이상 희생할 수 없다는 초라함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다.
서술자 '나'는 길 잃은 개를 반려자에게 인도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을 건져낸다. 그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인간을 그렇게 소중히 여겨"보라는 R에게 "그러니까 너는 꼭 인간을 도와줘."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나'의 격려가 R의 종 차별주의를 인정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의 메시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타자를 도울 것을 요청한다. '나'는 인간을 돕는 인간과 개를 돕는 인간의 관계를 동료로 설정함으로써 생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초라함을 세계와 연결시키는 방법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착취의 구조를 금세 바꿀 수 없는 나의 왜소함과 비인간 동물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격차 앞에서 느끼는 초라함을 만회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각자의 자리에 서서 동물이라는 존재로부터 눈 돌리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의 범위를 좁혀나가는 것. 불편함과 부끄러움과, 초라함과 죄책감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비인간 동물에 대한 윤리가 아닐까.
4. 동물 윤리 서사가 요청하는 것
『무민은 채식주의자』에서 서로 다른 톤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하는 열여섯 편의 소설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었으나, 일부 작품에서는 선명한 불쾌감을 느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권지예의 「미래의 일생」에서 서술자 '나'는 자연을 거슬러 본성을 막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반려묘의 중성화 수술을 거부한다. '나'는 후에 수컷 고양이를 데려와 반려묘와 교미를 시키고자 하는데, 반려묘가 수컷 고양이를 거부하다 헤치기까지 하자 "짐승은 암수만 있으면 당연히 교미하는 줄 알았다. 오죽하면 짐승처럼 붙어먹는다는 말이 있을까."라며 회한에 잠긴다. 한편 김봄의 「살아 있는 건 다 신기해」에서 서술자는 다리에 골절을 입은 햄스터가 동물병원에서 인간과 비슷한 치료를 받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 있는 건 다 신기하다"는 순진한 감탄을 터뜨린다. 이때 햄스터는 '단돈 이천 원'과 '우리 아기' 사이를 오가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호명된다.
두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비인간 동물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체계를 경유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일생」에서 서술자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밝은 미래를 살고 싶은 바람으로" 반려묘의 이름을 미래라고 지었다. 미래는 '나'와 처음 관계를 맺는 시점부터 이미 '나'의 바람과 욕구가 투영되는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서술자는 또한 반려묘를 설명하면서 독신, 정절, 이혼과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살아 있는 건 다 신기해」에서 햄스터는 상황에 따라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단돈 이천 원'어치 선물이 되었다가, 동물병원 의사 앞에서는 일방향적 수혜의 대상인 '우리 아기'가 된다. 햄스터가 약 먹기를 거부하거나 깁스를 한 모습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노골적인 감탄은 비인간 동물이 인간적인 세계관으로 편입되는 순간의 충격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비인간 동물의 말을 들을 수 없으므로 동물이 전달해온 의미를 추측하고 상상해서 인간의 언어로 번안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방법은 보다 사려깊어야 한다. 두 작품은 동물과의 교감을 소재로 삼고 있음에도 인간을 중심으로 비인간 동물을 배경으로 치환해버리는 근대적인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둔탁함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비인간 동물에게 가해지는 두 번째 폭력이다. 「미래의 일생」에서 서술자 '내'가 반려묘가 발정에 시달리는 것을 애틋한 슬픔을 느끼면서 지켜보기만 하는 장면에서 내가 느낀 불쾌함은 중성화수술에 대한 나의 입장 이전에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간극을 적극적인 상상으로써 매워 보려는 노력의 부재에서 오는 불쾌함이었다.
이 글에서 소개한 세 편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 있으려는 치열함을 보여주었다. 「7교시」에서 아라는 자연 회복 영역으로 난 고가의 끝까지 걷기를 희망한다. 「무민은 채식주의자」에서 '나'는 냉장고 속의 날고기와 시선을 교환한다. 「검은 개의 희미함」에서 '나'는 개 대신 사람을 먼저 도우라는 R에게 적의가 담기지 않은 메시지로 응답한다. 이들 소설은 생명권과 더불어 비인간 동물을 대하는 윤리에 대해 말한다.
열여섯 편의 단편을 읽으며 동물을 표상하는 서사가 텍스트 바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희생되고 있음을 지각하고 현실을 개편하려는 또 다른 세계관의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어떤 소설은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비인간 동물과 공존하려는 삶의 방식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통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서사들은 인간에게 각자의 몫만큼 타자를 도움으로써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료로서 연결될 것을 요청할 것이다. 초라함으로 미약하게나마 세상을 지탱할 것. 그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소설은 세계와 정동한다. (2020년 6월)
[1] 구병모 외.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2] 구병모. 「날아라 오딘」.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3] 이순원. 「새 식구가 오던 날」.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4] 태기수. 「랑고의 고백」.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5] 김은. 「오늘의 기원」.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태기수. 「랑고의 고백」.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6] 구병모. 「날아라 오딘」.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이장욱. 「무민은 채식주의자」. 『무민은 채식주의자』. 서울: 걷는사람, 2018.
[7] 성연철. “문 대통령 “그린뉴딜, 한국판 뉴딜 사업 안에 포함””. 「한겨례」, 2020년 5월 20일.
[8] 신혜정. “[3차 추경] 그린뉴딜에 5,867억 투입…일자리 1만7,000개 창출 기대”. 「한국일보」, 2020년 6월 3일.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닳은 초상화』 서평, 철든 아이의 자화상 (0) | 2017.10.15 |
|---|---|
| 2015 One Month Festival (4) (0) | 2017.08.21 |
| 2015 One Month Festival (3) (0) | 2017.08.21 |
| 2015 One Month Festival (2) (0) | 2017.08.21 |
| 2015 One Month Festival (1) (0) | 2017.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