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은 초상화』 서평
철든 아이의 자화상
김다혜
색을 잃어가는 게 두렵습니다.
―「시인의 말」 중
하필 퇴색이 가장 무섭다 한다. 그림의 자기고백이다. 『닳은 초상화』는 네모반듯한 원고지가 아니라 시퍼런 백지에 흘린 붓질이다. 그림에의 비유는 언어라는 최소한의 여과조차 거치지 않고 자신을 다 써내리고 싶은 시인의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세필의 움직임은 정교하고 결코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이미 닳았건만 캔버스를 찢고 나올 듯이 선명한 시인의 자아는 무엇인가. 모호한 테두리를 짚으며 내밀한 손짓을 따라가 본다.
1부 <굼뜬 호흡>을 여는 「마름, 마음」에서는 시작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나만의 바다는 나만의 것”이라는 새벽 별의 독백에 “나는 그런 거 가져본 적도 없는데” 말을 받아 잇는 화자의 손에는 잔해만 남아 있다. 바다가 펼쳐 있던 광활한 모래사장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다. 무너지고 멸망하는 세계에 홀로 서있는 화자는 “나까지 버리지는 말아줘”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책의 첫머리에서 처음 만나는 시인의 감정은 갈망이다.
나한테 확신을 갖는 것도 능력이다.
믿음이 없는 나는 나에게 불경하다.
―「희석된 삶」 중
믿음의 결핍 속에서 갈망은 자란다. 나의 실체는 잡히지 않고, 자신에게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펀지”로 비유되는 어린아이의 탐욕 같이, 뒤틀린 채 벌어진 아귀를 채우고 싶은 욕망은 1부에 팽배하여 있다. 사랑 혹은 사람을 향한 갈망은 변형을 거듭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그의 우울에 시선이 쏠린다.
몸을 재우는 곳이 고향이라면 난 영원히 객지가 될 것이다.
―「잠. 잠언. 잠꼬대.」 중
아무도 내게서 잠들 수 없다는 선언이다. 까닭은 화자의 비극적인 자기인식에 있다. 시인의 자화상에는 “태어나기도 전에 묘비를 세”우는 고질적인 절망이 깔려 있다. 이처럼 갈망의 한 극단에서 유기에 대한 불안이 피어올랐다면, 다른 끝에는 희망을 품는 데에도 물려버린 고단함이 배어 있다.
뱀의 눈을 보며 말해요.
너는 어디에 숨어 있었니?
넌 사람을 좋아해?
―「인간과 뱀의 교미」 중
화자는 꿈속에서 뱀을 마주한다. 뱀은 사람을 좋아할 수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없는 비인간적 존재를 상징한다. 마음속에 뱀이 산다는 것을 깨달은 시인에게 관계란 “기만”이다. 틈새를 매우기 위해 사람을 찾아 떠난 끝에 허무를 맛본다. 시인에게는 공허한 자신밖에 남은 것이 없다.
가난한 염세는 환상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이다. 2부 <외딴 섬>에서 시인은 제 속에서 침잠하며 물 밖을 상상한다.
내 손목에 닿은 칼날의 손잡이를 쥐어주고 목을 감은 밧줄을 내어주는 행위.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감을 돌리고 있었다.
―「순종」 중
화자가 상상하는 사랑은 가히 순응적이다. 화자는 당신의 자비로 겨우 연명한다고 적지만 무책임하게 사랑을 휘두르는 당신은 폭군에 가깝다. 하지만 당신을 향한 저항은 온데간데없고 오랫동안 살던 동네 같은 익숙함과 발그레한 설렘이 느껴진다.
시인의 가학적인 상상은 낯설지 않다. 화자는 길을 구르는 뼛조각을 함부로 주워 삼킨다. 뼈를 주워 삼키기는 자신에 대한 자해의 시도다. 연고 없는 뼛조각은 “영원한 객지”와 닮아 있다. 목적도 효용도 알 수 없는 죽음의 잔해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어이 실패하고 마는 갈증, 시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가? 여정이 끝난 지점에서 다른 색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너의 잠꼬대를 신기해하며 들은 새벽이 생각난다.
―「잠. 잠언. 잠꼬대.」 중
시의 어느 모퉁이에서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천진함이 숨어있다. 기저에 깔린 우울에도 불구하고 문득 묻어나는 순진한 애정은 시선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천진함은 시인이 꾸며낸 가면인가, 못내 놓치고 싶지 않은 꿈인가. 1부의 가장자리에서 시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일찍이 철이 들어버리는 아이로 매번 귀환한다.
―「태어나지 않은」 중
아이라기엔 일찍 철이 들었지만, 어른이라기엔 아직 덜 자란 아이. 시인의 자화상이다. 2부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에도 동일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 있는 미성숙한 존재는 하염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쁜 풍경을 찾아내버리곤 한다.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간극”에 있는 셈이다. 순간을 기록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변화하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또는 그 반대로 달려가는 와중에 시인은 풍경을 곱씹고 있다. 시인의 미성숙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3부 <흑백 꿈>에서 시인은 “퇴색에 관해” 입을 연다. 채도를 잃고 명암만으로 표현된 세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시는 일상을 향한다. 비로소 시인의 삶의 자세가 드러나는 것이다.
곪은 씨앗을 꼭꼭 묻어 썩은 이파리를 피운다.
도려낸다는 것은 상처를 외면하는 것.
나는 품은 채로 가련다.
―「당신의 연애소식을 듣고」 중
사람을 갈망하고, 사랑을 꿈꾸던 어른스러운 아이는 제 언어의 무게를 가늠한다. 추하게 곯았다. 하지만 시인은 무엇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었다. 오히려 다른 게 묻어 나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모노톤의 꿈은 선명한 시인의 생활을 덮고 있기에, 퇴색은 퇴색이 아니다.
시집은 시인의 광활한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조차 시인의 손끝에서 탄생하고, 누군가의 표정마저 시인이 그려낸 풍경이다. 시인은 자신의 절망스러운 손짓이 만들어내는 무엇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
시인이 적었듯, 글은 토악질에 가깝다. 안에서 불어난 감정을 살기 위해서 쏟아내는 것이다. 한 권으로 묶이기까지 퇴적되었을 절망을 구태여 상상하는 까닭은 누구나 미성숙한 자기를 품었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그림을 완성하는 필체에 애틋한 데가 있다.
시인이 내려두고 떠난 무엇을 받아내어 기쁘다.
2017년 10월 8일
김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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